나는 여태껏 많은 동물들과 이별을 했다. 그리고 대부분은 내가 선택한 일이었다. 입국 기약이 없어 떠나보낸 고슴도치, 죽어서 이별한 햄스터, 다산했다는 이유로 새끼손가락만 한 새끼들을 어미로부터 떨어뜨려놓는 용서받을 수 없는 악행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다 여느 애완동물을 키울 때와 같이 개를 키워보겠다는 가벼운 마음이 싹텄다. 유기견 보호소에서 분양을 받기로 하고 입양 직전까지도 물건 고르듯 보호소 사이트에서 개를 골랐다. 싹은 점점 자라 욕심이 가득 찬 나무로 자라 내가 가장 마음에 드는 물건, 닥스훈트 입양 공고를 보고 유기견 보호소를 향했다.



 보호소를 가서 철장에 갇힌 개들을 보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잘못돼있는지를 조금이나마 깨달았다. 곳엔 개나 고양이뿐만 아니라 내가 책임감 없이 떠나보낸 동물들도 함께 있었다. 개들이 짖는 소리에 수의사에게 말을 할 수도 없어 그저 미리 얘기해둔 닥스훈트만 데리고 나왔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개는 품속에서 매우 따뜻했다. 그때 데리고 온 닥스훈트는 지금 알버트라고 불린다. 알버트가 본명은 분명 아닐 텐데 개명된 것을 눈치챘는지 바뀐 이름을 부르면 오곤 한다. 알버트가 꼬리를 신나게 흔들고 있으니 분명 행복할 것이라 낙관했다.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확신했다. 내 마음 편하자고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거라고 믿으며 개에게 제멋대로 이름표를 달았다. 정말 준비된 사람에게 갔어야 할 알버트는 다른 슬픔이나 죄책감을 잊을 정도로 내게 5년 동안 행복을 주었다. 나는 썩은 나무가 선행으로 포장된 위선이라는 열매로 가득 찬 것을 또 한번 이 영화를 통해 알았다.


 '개에게 이름을 지어준 날'은 처음 내가 유기견 보호소를 갔을 때처럼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내가 원한 강아지를, 내가 편하고 여유가 있을 때 데려온 것뿐인데 마치 모든 유기견들을 위해 봉사하는 마냥 우쭐한 내 모습이 너무나 창피했다. 알버트는 그저 우리 집에 또 한 번 들린 고슴도치, 햄스터, 페럿이었다. 나는 또 하나의 생명을 쉽게 들이며 같은 실수를 향해 가고 있었다.



 나는 아직까지도 지독하게 이기적인 사람이다. 개공장에서 사람들이 금전적으로 개들을 악용하는 것을 비난하면서도 감정적으로 동물을 이용하는 내 모습은 쉽게 보지 못했다. 가진 것을 포기하면서 다른 생명을 살리지도 않았음에도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나를 속였다. 나를 좀 더 냉철하게 보아야 다른 사람한테 샵에서 분양 받기보다 유기견 분양을 권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분양하는 사람은 '요시다'씨처럼 혹시라도 입양하려는 사람이 개를 평생 책임지지 못할 것 같다면 분양하지 말아야 한다. 새로운 입양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미 상처를 받은 개가 또 버려지는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계속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다음 세대에 생명의 소중함을 올바르게 가르쳐준다면 유기되는 동물이 훨씬 줄을 것이다. 생명에게 새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면서 더이상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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